“꼴찌면 어떤가요? 최선을 다했으면 된거지요”
경연에 참가한 모녀

 

안감이 엄습했다. “이 팀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것 아닌가?” 우연히 갤러리석 앞쪽에 앉았다 지켜보게 된 이 팀은 경연장(미식스튜디오) 맨 앞줄 왼쪽편에 자리잡은 참가번호 1번 ‘류다인, 최슬아’팀. 엄마(38·중국 지린성 출신)와 딸(11) 사이었다.

올해 처음 특별프로그램으로 편성된 NS푸드페스타 '글로벌 라면' 부문은 K-라면을 주재료로 향신료, 채소 등 고국에서 사용했던 부재료를 곁들여 색다른 라면요리를 만드는 경연대회다. 그런데 이 팀은 경연 시작과 함께 주재료인 라면은 한켠에 처박아 두고 개별적으로 가져온 국수(소면)를 삶기 시작한 것. “이건 아닌데. 경연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나?”

요리경연 시간은 딱 1시간. 딴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인 이 팀, 과연 제한시간 안에 마칠 수 있을까? 뭔가 이상했다. 마음 한편에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면식도 없는 팀이지만 앳된 얼굴의 딸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마치 한 식구인 것처럼 점점 몰입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요리를 하는 태도나 에티켓 준수만은 수준급이었다는 것. 요리의 첫째 덕목인 위생을 철저히 지키며 차분하게 식재료와 용기를 다루는 모습이 그랬다. 재료를 다듬고 남은 부산물들도 나오자마자 곧바로 테이블 아래에 준비한 비닐봉투로 옮겨 담아 도마 위를 늘 청결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더욱 눈에 띈 것은 두 모녀의 표정이었다. 뭔가 긴장되고 시간에 쫓기는 순간인데도 엄마는 딸을 다그치거나 굳은 표정을 짓지 않고 연신 웃는 얼굴로 대했다. 그래도 이것은 아니다. 아직도 소면을 삶고 있다. 도대체 소면은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것일까?

마침내 딸이 조막만한 손으로 다 삶은 소면을 건저내 정갈하게 준비한 얼음물에 식히기 시작했다. 다 식힌 소면이 담긴 그릇을 엄마 앞에 내려놓자 엄마는 나무젓가락에 소면 한 움큼을 끼워 넣어 폭포수 모양을 만들었고, 콩식용유가 끓고 있는 프라이팬 위로 옮겼다. 그리고 국자로 끓는 기름을 소면에 끼얹기 시작했다.

소면을 기름에 튀기는 모습

“소면을 기름에 튀기려는 것 같은데 왜 담그지 않고 기름을 부어가며 익히지? 우리가 모르는 중국 전통 요리 비법이 있는 것인가?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은데.” 그러나 이 팀은 매우 진지했다.

나무젓가락에 끼워진 소면에 연신 끓는 기름을 부어가며 소면이 완전히 튀겨져 굳어질 때가지 반복 행동을 계속했다. 엄마의 체력에 한계가 오면 딸이 교대로 같은 행동을 이어갔다. 10분이 흐르자 젓가락에 끼워진 튀김 소면은 폭포수 형태를 유지하며 완성됐고, 한쪽으로 조심스럽게 옮겨졌다.

아! 이제 소면 튀기기는 끝났구나! 아니었다. 남아있던 삶은 소면을 또 가져다 두 개째 튀기기 시작했다. 아차! 경연참가자들은 심사위원  시식용과 전시용 두 그릇을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폭포수 소면 튀김 두 개는 20분에 걸쳐 완성됐다. 뒤쪽 한 팀은 벌써 요리를 완성해 평가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엄마와 딸의 손놀림이 조금씩 빨라졌다. 야채를 정성스럽게 다듬기 시작한 것. 오이를 작게 토막치고 이를 얇게 펴서 채썰기를 했다. 다른 채소도 얌전히 다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도 주재료인 라면은 구석에 처박혀 있다. 경연 마감시간은 다가오고 있는데 도대체 왜?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난 엄마는 15년 전 한국에 건너와 가정을 꾸렸고 슬하에 두 딸을 뒀다고 한다.  이번에 요리를 같이한 딸은 초등학교 4년에 재학 중인 둘째딸이다. 글로벌 라면 경연대회 개최 소식을 듣고 고향에서 먹던 비빔면 요리가 떠올랐다. 중국 고향에 계신 엄마의 비빔소스가 레시피 비법이었다. 약간 매운 산초 기름과 간장, 설탕, 마늘, 파 등을 넣어 비빔면 소스를 만들었다. 이제 시간이 문제다. 벌써 40분이 흘렀다. 남은 시간은 20분. 그제서야 주재료로 제공된 장인라면 담백한맛을 집어들었다. 면을 삶기 시작했고, 라면 액상소스는 한번 끓여낸 뒤 국물용으로 따로 담아냈다. 삶은 면이 완성되자 미리 준비한 소스와 채 썬 야채를 부어 비비기 시작했고, 면을 삶고 남은 면수에 새우와 전복을 삶아냈다. 이제 두 개의 그릇에 나눠 담기만 하면 된다.

완성된 폭포수 비빔면 요리

먼저 폭포수 모양 튀김 소면을 그릇에 담고 그 아랫부분에 비빔면을 채워넣었다. 남은 시간은 2분여. 토핑용으로 준비한 삶은 새우와 전복을 비빔면 위에 가지런히 얹으면서 요리는 완성됐다. 경연시간 1시간을 꽉 채워 20개 팀 중 꼴찌로 아슬아슬하게 심사위원들에게 가져갔다.

결국 글로벌 라면 부문 최우수상은 K라면을 재해석한 창의적인 요리로 평가받은 ‘남지혜&황다중’팀에게 돌아갔고, 이 팀은 입상에서 탈락한 팀 전원에게 주어지는 장려상을 받았다.

라면 요리 경연대회에서 왜 소면을 튀겼을까? 엄마 류다인 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먹는 라면땅 같은 거예요. 비빔면을 먹고 나면 양이 좀 아쉬울 수 있는데 그때 먹는 후식용 과자 같은 거지요. 고향에서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나서 요리의 모양도 내고, 간식으로도 먹을 수 있게 만든 거예요"

식재료가 풍부하지 않던 어린 시절에 엄마가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소면 튀김 과자를 만들어주시던 기억을 되살려 낸 것이다. 류다인 씨는 경연대회의 취지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멋이나 부린 요리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경연대회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고향의 기억과 접목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맛은 추억이고,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류다인 씨는 어릴적 가족들과 먹던 맛이 담긴 추억을 요리에 버무린 것이다.

완성된 요리를 선보이는 참가자

경연 참가 전에 딸과 폭포수 모양으로 소면 튀기는 연습을 부단히 했다고 한다. 끊는 기름에 담가서 튀기지 않고 국자로 부어 익힌 것은 폭포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류다인 씨는 경연 중에도 엄마 옆에서 묵묵히 도와준 딸이 든든하고 대견스러웠다고 했다. 최우수상을 놓쳐 아쉽지 않냐는 질문에는 “아니요. 글로벌 라면 대회라서 다른 나라도 분명 맛있는 레시피나 특별한 요리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 부분은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꼴찌면 어떤가요? 최선을 다했으면 된거지요.”라고 밝게 답했다.

내년에도 시간만 허락한다면 꼭 참가해서 다른 모양의 요리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벌써부터 류다인 씨의 폭포수 소면 튀김을 얹은 ‘야채새우 비빔면’에 이은 또다른 독특한 모양의 요리가 기다려진다.